우리 농산물의 개성과 역동성을 깨운다 : 미생물의 완전한 연금술, 발효

추천
등록일
2022-11-23
내용




‘발효’를 빼고 한국의 식문화를 거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최고의 문화유산, 한식을 완성하는 발효식품은 전통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화를 거듭하며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자연을 품어 생명의 역동성을 지닌 우리의 전통 발효식품. 그 특별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본다.

글 편집부
감수 박채린(세계김치연구소 책임연구원) 

참고
『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 샌더 엘릭슨 카츠, 글항아리, 2021. 『KFOOD』, 행복이가득한집 편집부, 디자인하우스, 2021.

발효는 곰팡이, 효모, 세균 등 미생물의 작용으로 원래 물질이 분해되어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발효는 흔히 불 없이 음식을 조리하는 기술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음식을 날것으로 먹지 않고 조리를 하는 이유는 소화 흡수를 돕고, 영양소 손실을 최소화하며 체내 흡수율을 증가시키고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인데, 발효식품은 불로 익히지 않았음에도 이 같은 효과를 낸다. 이러한 발효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음식을 보존하거나 소화가 쉽고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코올 발효, 우유를 발효한 요구르트와 버터, 치즈 외에도 설탕을 넣어 달콤하게 만든 차를 발효시킨 콤부차 등의 건강 음료, 곡물의 발효, 채소의 발효, 육류 및 어류의 발효, 콩류 및 씨앗류의 발효 등 놀랍도록 다양한 발효식품이 있다.

발효식품은 이토록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다양하게 발전해 왔으나, 한국의 발효법은 ‘복합균에 의한 자연 발효’라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식의 발효는 자연 발효와 기능성 발효로 나뉜다. 세균이나 효모, 곰팡이 등 복합적인 미생물이 관여되어 복합 발효가 이루어지는 것을 자연 발효라 하며, 목적에 따라 기능이 우수한 균을 선발해 집중 배양하고 단일균을 중심으로 발효시키는 것을 기능성 발효라고 한다.

한국의 발효식품은 대부분 자연 발효에 속한다. 발효식은 부패의 시간성을 역이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음식의 고유한 특징이자 발효식의 지혜다. 한식의 발효식품은 종류와 유형이 다채로울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발효식품을 먹는 빈도와 활용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한 끼 식사에서 다양한 발효식품을 한 번에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음식이 발효와 
얼마나 밀접한지를 말해준다.

콩을 주 원료로 하는 한국의 전통 장류는 크게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이 있다. 콩은 단백질, 식물성 지방, 탄수화물 및 미네랄 등이 함유되어 있는데, 날콩에는 아미노산 중 하나인 트립신의 소화를 방해하는 물질이 들어 있어 반드시 가열해서 먹어야 한다. 이런 콩을 삶고 으깨어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만들어 오랜 시간 곰팡이를 번식시킨 것이 장의 기본이 되는 메주다. 일본의 된장은 황국균 단일 종으로 발효되지만, 한국의 전통 메주는 황국균 외에 털곰팡이, 뿌리곰팡이, 푸른곰팡이, 누룩곰팡이, 좁쌀곰팡이, 홍국균 등 다양한 곰팡이와 고초균 등이 작용하여 천연의 복합적인 맛을 낸다. 메주에서 자란 각종 곰팡이와 세균은 효소를 생산하고, 이 과정에서 콩의 식물성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전분질은 당분으로 분해된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몇 달간 햇볕을 쬐며 항아리 속에서 발효시키면 메주 속 콩의 향미 성분은 소금물에 녹아 분해되고, 이것이 소금물 속에서 다시 발효되면서 오묘한 맛을 품은 간장이 된다. 풍미가 더해진 간장을 빨아들인 메주를 건져 가른 뒤 소금을 섞어 치대어 다시 발효시키면 된장이 된다. 그리고 이 메주를 가루로 내어 쌀밥 또는 찹쌀밥과 고춧가루 등을 섞으면 고추장이 된다. 콩으로 만든 메주에서 간장과 된장, 그리고 고추장까지 제각기 고유의 깊은 맛을 품은 우리 장이 탄생한다.

김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유별나다. 음식평론가 메이 친은 미국의 요리전문지 『사브어(Saveur)』에서 “도대체 어느 나라의 어떤 음식이 김치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절반이라도 미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쓴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2008년 최초로 한국인을 우주정거장에 파견하면서 특수하게 발효시킨 김치도 함께 보냈다. 몇 년에 걸쳐 수백만 달러를 들여 우주로 보낼 김치를 준비한 것이다. 우주에 가더라도 꼭 챙겨가야 할 음식, 그만큼 한국인에게 김치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김치는 일반적인 채소 발효와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진다. 보통의 채소 발효는 소금물에 절이는 방법을 택하거나 고농도 소금에 오래 절이는 단순한 방법을 쓰지만, 김치는 배추를 6~9시간가량 소금에 절여 유해 미생물을 제거한 뒤 소금기를 빼고 그 다음 젓갈과 각종 채소를 버무린 김치 전용 양념을 배춧잎 사이에 넣어 발효를 유도하는 복합 발효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절여서 발효시킨 김치는 유해 미생물의 초기 생존을 막아 유산균의 활동을 도울 수 있고, 삼투압에 의해 김치 양념이 절인 배추에 침투해 맛 성분과 물질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발효가 효과적으로 진행된다. 이 같은 발효법은 오랜 저장 기간에도 채소의 아삭한 질감을 유지시키고 발효의 효율성도 높인다.

때문에 김치는 다른 발효식품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과 종류의 유산균을 보유한다. 김치에 있는 것으로 밝혀진 유산균의 종류만 34종이 넘고, 숙성된 김치 국물 1g에는 약 1억 마리의 유산균이 존재한다고 하니 이쯤 되면 유산균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김치 유산균은 항균 작용, 돌연변이 억제, 항암 작용 외에도 비타민 B군과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를 생합성 하는 기능이 있다. 특히 유산균이 만든 박테리오신은 변비나 설사, 암, 고혈압 등의 원인이 되는 부패균, 위염과 위암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생육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김치의 특징은 동물성 발효식품과 식물성 발효식품의 조화로 맛과 영양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식물성 절임채소에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을 넣어 맛과 영양 모두를 잡는 것은 김치만의 고유한 창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생채소를 버무린 김치에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을 넣는 것은 초기 발효를 도울 뿐 아니라 영양적 균형을 맞추고 특유의 감칠맛까지 더하여 김치만의 특성을 가지게 한다. 한식은 보통 소금보다 간장, 된장, 젓갈 등의 발효식품으로 음식에 간을 하지만, 김치처럼 젓갈로 절임채소의 간을 하는 제조방식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유한 특질을 가진다.

무엇보다 김치는 수백 가지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지역마다 특성이 다를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고유의 레시피가 있다. 획일화된 맛과 규격화된 형태의 음식을 추구하던 산업화의 시대를 지나 각각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즐기는 요즘, 수백 종류의 김치의 개성은 다른 나라의 어떤 발효식품과도 차별화되는 힘을 지니고 있다.전통 발효식품은 오천 년을 이어온 우리 발효문화의 꽃이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김장하는 날, 장 담그는 날, 메주 쑤는 날은 잔칫날이고, 특별한 행사였다. 온 집안에 젓갈 끓이는 
냄새가 가득해지면 마음까지 풍성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섞이고, 익고, 삭으며 기다림으로 빚은 이 놀라운 맛에는 우리 조상의 지혜와 슬기가 담겨 있다. 지금 젊은 세대가 열광하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우리의 발효식품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우리 문화의 저력과 무한한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전통식품이 새로운 시대에 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여 식탁에 건강한 발효를 꽃피우길 바란다. 아울러 365일 식탁에 오르는 일상의 식품을 넘어 우리 고유의 개성과 문화를 발현하는 매개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첨부파일

댓글쓰기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