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무서운 굶주림… 지구촌 식량확보 ‘각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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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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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이스라엘·미국·아랍에미리트 4국이 모여 만든 국가 협력체 ‘I2U2′는 지난 14일 첫 정상회담 의제로 ‘식량 안보’를 선택했다. 이날 화상으로 개최된 회의에서 4국은 인도에 기술·자금을 지원해 ‘식량 공원(food park)’를 조성, 식량 생산량을 극대화하기로 했다. UAE가 20억달러(약 2조6000억원)를 투자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첨단 농업 기술을 제공하는 데 합의했다.


미국이 다른 사안을 제쳐두고 식량 문제를 최우선으로 다룬 것은 식량난이 아시아 태평양과 중동 지역의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 국가로부터 밀 대부분을 수입하던 중동 국가들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했고, 일부 국가에선 소요 사태까지 일어났다. 세계 2위 밀 생산국인 인도가 ‘구원투수’를 자청했으나, 올봄 기록적인 폭염으로 자국 사정이 급해지자 지난 5월 중순 갑자기 밀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인도만 믿고 있던 국가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이상 기후와 코로나 팬데믹, 전쟁, 비료값 폭등, 공급망 교란 등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 각국이 먹거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지금 충분히 논의되고 있지 않은 문제 중 내가 걱정하는 건 식량 문제”라며 “식량 가격 급등은 단순한 물가 상승의 문제가 아니라 지정학적 갈등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식량 부족

요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곳곳에선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쉽게 볼 수 있다. 빵이 일찍 동나 새벽부터 줄 서지 않으면 한 덩어리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800~850g짜리 빵 공식 가격은 작년 11월 6500레바논파운드(약 4달러)에서 올해 5월 1만6000레바논파운드가 돼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암시장에선 2만5000레바논파운드에도 거래된다.


식량 가격 급등 이후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의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선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국민 2200만명 중 80%가 끼니를 거를 만큼 극심한 식량 부족을 겪은 스리랑카는 최근 결국 민중 봉기로 정권이 무너졌다. 경제난에 빠진 과테말라에서는 올해 5월까지 9명이 영앙실조로 숨졌다. 과테말라 정부는 인구 중 26%인 460만명이 올해 식량난과 영양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에콰도르, 파나마, 페루 등 남미 국가에서는 식료품 부족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날로 확산 중이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심각한 식량 불안정’ 상태인 인구는 3억4500만명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보다 6900만명 늘어났다. 심각한 식량 불안정은 적절히 영양을 섭취하지 못할 경우 생명이나 생계가 즉각 위험에 빠지는 상태다. 지난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에서 아마두 호트 세네갈 재무장관은 “식량 부족 사태가 코로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 세계 식품 가격이 단기간에 치솟은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이지만, 글로벌 식량 상황은 이미 전쟁 이전부터 불안했다. 이상 기후로 미국 등 주요 곡물 생산·수출국의 작황 부진이 심했고, 미·중 무역 갈등과 코로나 팬데믹 대유행이 공급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에 따라 밀과 옥수수, 콩 등 국제 곡물 가격은 이미 2020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25.7로, 재작년(98.1)보다 28% 올랐다.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159.7) 정점을 찍은 후 지난달 154.2로 조금 하락했지만 여전히 예년에 비해 훨씬 높다.


최근 몇 주간 밀을 포함한 농산물 선물 가격이 하락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에 합의했지만 당장 식량난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노무라투자은행은 지난달 말 낸 보고서에서 글로벌 식품 가격 변동과 그 여파가 아시아에서 나타나기까지 대략 6개월 정도 시차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한국, 인도, 싱가포르 등 아시아 9국에서 올 하반기 식료품 가격 상승폭이 지난 5월보다 더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가뭄과 폭염 등으로 주요 작물 지역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국제곡물위원회(IGC)는 지난 21일 유럽을 휩쓴 폭염을 고려해 세계 옥수수 생산량 전망을 낮췄고, 아르헨티나도 가뭄 탓에 밀 수확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작년부터 급등한 비료 가격도 문제다. 블룸버그는 “지난 2년간 비료 가격이 3배 이상 뛰었다”며 “농부들이 비료 사용량을 줄이면서 곡물 수확량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불붙은 식량 보호주의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자 식량 수출국들은 외교 갈등도 불사한 채 ‘식량 보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지난달 닭고기 수출을 금지하며 이웃 국가들을 ‘치킨 대란’으로 밀어넣었다. 호텔·식당 영업이 정상화되며 국내 닭고기 수요는 크게 증가한 반면, 사료값 급등과 외국인 노동자 부족 등으로 공급은 줄자 자국 물가 안정을 위해 수출을 막은 것이다. 닭고기 수입량의 3분의 1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던 싱가포르는 황급히 브라질 등 다른 수입처를 찾아 뛰어야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말레이시아 정부에 여러 차례 규제 완화를 요청했지만 현재까지도 일부 품종의 수출만 허용된 상태다.


지난 4월 말 세계 최대 팜유 생산국인 인도네시아는 자국 물량 부족을 이유로 팜유 수출을 금지했다. 생산 업자들이 내수 시장 대신 해외에 물건을 갖다 팔면서 인도네시아 마트에서 식용유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소요 사태를 우려해 부랴부랴 빗장을 걸어잠근 것이다. 파키스탄 역시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자 국민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설탕 수출을 금지했다. 유럽 최대 옥수수 수출국인 루마니아는 “가뭄으로 올해 옥수수와 해바라기씨 수확량이 크게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국내 시장을 안정시킨 후 남은 물량만 수출하겠다는 방침을 최근 밝혔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에 따르면, 올 들어 부과된 식량·비료 관련 수출 제한 조치는 34국에서 55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37건이 26일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은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식량 보호주의’ 시대에 불을 붙였다”고 했다.


다른 나라에 먹거리를 의존해온 국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특히 유럽은 최대 화두인 환경문제도 잠시 뒷전으로 밀어둘 만큼 비상이 걸렸다. 유럽연합(EU)은 지난 3월 보존 목적의 휴경지에서도 일시적으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 이어, ‘지속 가능한 농업 계획’도 재검토에 들어갔다. 2030년까지 비료 사용을 20% 줄이고 유기농 경작지를 9%에서 25%까지 늘리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전략은 전쟁 이전 세계에 기반한 것으로, 지금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환경단체들도 “글로벌 식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바이오 연료 사용 의무 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옥수수·콩 등 곡물로 만드는 바이오 연료는 대표적인 ‘친환경’ 수단이지만, 세계 식량 위기 앞에서는 한낱 사치로 여겨지는 셈이다. 미국 싱크탱크 세계자원연구소는 유럽과 미국에서 바이오 연료에 쓰는 곡물의 50%만 줄이면 우크라이나의 주요 곡물 수출량 전체를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가별로도 대책 마련에 부심 중이다. 아일랜드는 1200만유로(약 160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농가에 지원해 밀·귀리·보리 등 곡물 재배 면적을 늘리는 대책을 지난 3월 내놨다. 보리와 밀, 귀리를 추가로 재배하는 농가엔 헥타르당 400유로, 콩와 완두콩을 재배하는 농가엔 300유로를 지불하는 방안이다. 아일랜드 정부는 이 조치로 현재 30만헥타르 정도인 농작물 재배지를 2만5000헥타르 더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두고 FT는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전시 경작’ 프로그램을 연상시킨다”고 평가했다. 스위스는 최근 곡물 비축량을 기존 3~4개월 치에서 6개월 치로 늘리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에서 식량 비축을 담당하는 피터 레만은 “세계는 더 취약해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곡물 비축량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며 “만약 공급망이 붕괴되거나 악천후나 가뭄으로 수확에 실패한다면 이는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전부터 식량 비축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온 중국은 최근 들어 식량 안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중국은 전 세계 옥수수 비축량의 69%, 쌀 비축량의 60%, 밀 비축량의 51%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국가식량전략비축국은 작년 11월 “중국의 곡물 비축량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밀 비축량은 18개월 동안의 자국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규모”라고 밝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산업화를 진행한다고 해서 식량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거나 국제시장에 의존해 해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해외 농지 투자와 신품종·종자 개발 투자에 주력해온 중국 정부는 식량 증산을 위해 유전자 변형 작물(GMO)에 부정적이던 기존 입장도 바꿨다. 올 초 유전자 변형 작물 승인을 위한 시범 규정을 발표하고 생산을 늘릴 채비에 나섰다. 최근엔 미국산 식량에 대한 의존이 미·중 갈등 속 ‘약한 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미국산 의존도가 특히 높은 대두 자급률을 늘리는 방안도 다각도로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해외 유통망 적극 참여해야”

우리나라는 국제 식량 가격이 요동칠 때마다 직격탄을 맞아왔다. 2020년 말 기준 곡물 자급률이 20.2%에 불과해 외부 가격 변동에 취약하다. 자급률이 92.8%인 쌀을 제외하고는 주요 식량 작물 대부분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며 농지 면적이 대폭 감소한 반면 육류 소비량이 많아지며 사료용 곡물 수요는 늘어난 결과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식량 안보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2016년 28위에서 2021년 32위로 뒷걸음질했다. 김나율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식량 수급 구조가 비슷한 일본과 달리 식량 안보와 관련한 데이터부터 제대로 구축·공개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곡물부터 유제품, 수산물까지 다양한 품목에서 식량 자급률을 수집·공개하고 있고, 칼로리 공급량 등도 계산해 식량의 수입이 중단될 경우와 같은 유사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동안 식량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계속돼 왔다. 현재 정부 목표대로라면 밀 자급률은 2020년 0.8%에서 2025년 5%로, 콩 자급률은 30.4%에서 33%로 높아진다. 하지만 이전 정부부터 자급률 목표치 달성은 번번이 실패해왔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는 2018년 곡물 자급률을 21.8%에서 2022년 27.3%로 올리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농사짓는 땅이 매년 줄고 있는 데다 농촌 인구 고령화로 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졌다. 기후 등 요인으로 국내 생산이 어려운 품목도 있다.


이 때문에 해외 공급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해외 곡물 유통 업체나 곡물 터미널 등에 대한 투자를 늘려 공급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2000년대부터 미쓰이·마루베니 같은 종합상사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세계 각지에 곡물 저장소와 터미널, 해외 생산 기지를 확보해 왔다. 우리나라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이 2019년 우크라이나에서 연간 250만톤의 곡물을 처리할 수 있는 곡물 터미널 운영을 시작하는 등 최근 들어서야 투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 김종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식량 위기가 왔을 때 최소한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있으려면 밀과 옥수수 등의 경작지와 생산량을 좀 더 끌어올려야 한다”며 “해외 곡물도 단순 수입에서 벗어나 곡물 터미널 같은 유통 단계부터 개입해 국제 곡물 가격에 대한 대응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성유진 기자

* 기사, 썸네일이미지 출처: https://www.chosun.com/economy/mint/2022/07/28/JW2OMKZTRFGGPMJ7WZZMN25F5Q/?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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