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맥장’성명례 명인: 세월 속에 단단하게 익은 ‘전통 장’의 맥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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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3-10-10
내용

자연에서 오래 기다리고 삭히며 정성으로 빚는 전통 장은 그윽한 향과 깊은 맛으로 한식을 완성합니다.
전통 비법의 맥을 잇고 현대적인 관리 방식으로 우리 장맛의 백 년을 이어가는 성명례 명인을 찾아
경북 청송으로 향했습니다.



전통 장과 함께한 35년의 세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상북도 청송은 맑고 고요합니다. 주왕산을 비롯해 곳곳에 보이는 비경과 굽이진 하천을 따라 넓게 펼쳐진 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슬로시티’라는 이름처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복잡한 것 없이 단조로운 길을 따라 도착한 한국맥꾸룸 본사에는 탁 트인 대지에 단정하게 올려진 한옥 건물 ‘송주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맥꾸룸은 ‘우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꾸러미들’이라는 이름으로 ‘대맥장’ 성명례 명인의 전통 장을 만드는 곳입니다. ‘대맥장’이란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사대부 집안에 내려온 검은콩과 보리쌀을 섞어 발효시킨 장이에요. 쌈장처럼 찍어 먹는 장으로, 고급 장류에 속합니다.

명인은 2012년 ‘대맥장’으로 대한민국 식품명인 자격을 얻었지만, 장을 담근 세월은 그의 삶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명인은 안동 권씨 집안에 시집온 후 시어머니인 김말임 여사와 함께 집안 대대로 전승되어 오는 장류 제조 비법을 익히고 수십 년간 장을 담갔습니다.

1989년 경북 청송에 한국맥꾸룸을 설립해 장류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집집마다 된장을 담가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어요. ‘누가 된장을 사 먹느냐?’ 하던 시기였지만, 아파트 거주 문화가 확산하면서 몇몇 지인들의 부탁을 받아 된장을 담가 주었죠. 그러다가 꿀맛 같은 된장이라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아파트 반상회가 열리는 날에는 차에 된장을 가득 싣고 가서 팔았습니다. 이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어요. 한 손으로 주문 전화를 받고 다른 한 손으로 운전해야 할 정도였죠. 잠자는 시간도 모자라 결국 판매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러 된장을 백화점에 입점시켰습니다. 이미 입소문이 나 있던 명인의 된장은 놀라운 속도로 품절 사례를 빚게 됐어요.



깊은 장맛의 비결, 수고로움을 더한 ‘겹 된장’
된장을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큰 맥락은 일반적으로 동일합니다. 콩을 삶고 메주를 만들어 띄운 다음 염수를 부어 장을 담근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간장을 퍼내 분리하는 것이죠. 이후 남아 있는 장은 건져 된장을 담급니다. 하지만 이 방식으로 된장을 만들면 간장을 퍼낸 뒤 남은 장은 짜면서도 약간 떫은맛을 내게 됩니다. 이점을 보완한 것이 명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온 ‘겹 된장’ 방식이에요.

‘겹 된장’은 품질 좋은 콩을 삶아 띄운 뒤 말린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염수를 만들어 부어 1차 숙성(6개월)을 시킵니다. 이후 간장과 된장을 분리하고, 간장을 퍼낸 된장에 다시 말린 메주를 넣은 뒤에 소량의 염수를 부어 다시 2차 숙성(6개월~12개월)을 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간장은 6개월, 된장은 12~18개월의 숙성 기간을 거치면서 깊은 감칠맛과 함께 진한 장맛이 우러나요. 간장을 퍼낸 다음 남은 된장에 메주를 더 넣어서 장의 맛을 충분히 끌어내는 것이죠. 더 많은 수고로 간장의 맛과 된장의 맛을 함께 살리는 명인만의 ‘겹 된장’ 비법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맥꾸룸에서는 대맥장의 명맥을 이으면서 ‘겹 된장’을 보급, 대중화하고 있어요. ‘겹 된장’은 ‘맥된장’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들을 만납니다.

성명례 명인의 ‘대맥장’

‘대맥장’은 검은콩과 보리쌀을 섞어 발효시킨 장이에요.
질 좋은 검은콩을 선별해 볶은 뒤, 볶은 콩을 물에 담가 불립니다.
불린 콩은 다시 잘 삶아 보릿가루를 섞고 찝니다.
닥나무 이파리에서 발효시킨 후 메주를 띄워 곰팡이가 피어나게 하는 점이 일반 메주와 다릅니다.
일반 된장은 일 년 정도 숙성을 해야 하지만 ‘대맥장’은 보름이면 만들어 먹을 수 있어요.



현대화된 관리로 더욱 대중화된 전통 장


이 같은 귀한 전통의 맛이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녀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정보산업 분야 공학 석사이자 벤처기업 경영 팀장으로 있던 아들 권형인 씨는 전통 장류 생산기술을 발전시켰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딸 권혜나 씨는 명인의 전수자가 되어 마케팅과 브랜드 관리 등 전반을 관리하며 판로 개선과 디지털화를 이끌어 경영 개선을 이루었어요. 판로 확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백화점에만 입점하여 있던 ‘맥된장’을 마트 등 곳곳의 유통 채널에 입점시켰고, ‘맥된장’을 대중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의 제조를 이어가면서 현대적인 관리를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콩을 삶거나 틀을 만들고 발효하는 과정은 자동화되었지만, 항아리에 된장을 담고 숙성하는 과정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매일 2,970여 개의 항아리를 열어 장의 발효 상태와 온도, 습도, 점도, 색도를 체크하고 외부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면포를 덮어 미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는 여전히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하죠.

동시에, 시스템과 품질 관리, 유통은 위생적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대화했습니다. 외부 해충들로부터 장을 보호하기 위해 항아리를 보관하는 하우스를 별도로 지어 위생 상태를 유지해요. 사람을 따라 해충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하우스에는 외부인 출입도 금지합니다. 제품 포장은 전통 장류 중 최초로 식품 안전 경영시스템 국제인증(ISO 22000)을 취득한 작업실에서 철저한 위생 관리하에 진행됩니다. 사람의 손맛이 들어가는 정성은 다하되,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관리를 적극 도입한 것이죠.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맛


한국맥꾸룸은 2019년부터 전통 장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6차 산업과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코로나 사태로 주춤하였지만, 오히려 준비 기간이 충분하여 체험 프로그램을 더욱 정교화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경북교육청 등과 연계하여 직접 된장을 만드는 체험 교육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카페와 정원을 개방하여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전통 장을 알 수 있는 소통의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현재 성명례 명인과 딸 권혜나 씨는 전통 장을 활용한 요리법이 담긴 책을 집필 중입니다. 그간 한식 조리법으로 소개된 책들에는 양조간장, 양조된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전통 장류에는 맞지 않는 요리법이 많았어요. 이런 부분을 개선, 보완하고자 전통 장류에 맞는 요리법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류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록을 통해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통 사업을 하려면 무엇이든 꼼꼼하고 철저해야 해요. 적당히 하면 안 되지요.
좋은 장은 시간을 공들여 빚는 것과 같아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우리 자녀들과 자녀의 자녀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우리 전통 장이 살아남을 수 있어요.
끊임없이 전통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해요.

30년이 넘도록 오랫동안 전통의 맥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던 덕분일 겁니다. 현재 한국맥꾸룸의 ‘맥된장’은 미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베트남으로 수출 중이에요. 집안 대대로 먹던 우리 전통 장이 이처럼 날개를 달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것은 명인과 함께 전통을 잇는 젊은 후손들의 부러지지 않는 뚝심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전통 장의 가치를 넘어 우리 맛의 우수함을 세계로 전하는 이들에게서 한식의 밝은 미래를 봅니다.



이한나 사진 박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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